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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 장흥기행
  • 등록일  :  2008.09.11 조회수  :  2,878 첨부파일  : 
  •  

    추석입니다
    명절이면 고마운 사람들 더욱 그리워집니다
    마음은 고향으로 향하는데, 저는 이미 고향에 있습니다
    그러나 제2의 고향, 평택 그곳이 그립군요
    이사장님, 사무국장님 모두 안녕하시지요?
    보름달이 둥실둥실 떴으면 좋겠습니다
    명절에도 더욱 행복하십시오
    지난 여름 미백 이청준 선생의 장례식에 다녀와서 썼습니다 
    재미가 있으셨으면 좋겠는데, 부끄럽군요 
    그리고 3주년 동영상을 보았는데, 정말 자랑스럽군요 평택은 무지개가 피었습니다 축하드리고, 저도 마음속으로 계속 응원하겠습니다




    축제, 未白 이청준 선생 노제




    2008. 8. 2. 토요일


    무릇 사람이 한평생을 살다 가는 마지막 길에 작별인사라도 있어야 하는 법


    전남 장흥군 회진면 진목마을에서 열린 미백 이청준 선생의 노제 소식을 신문에서 보고 토요일 쉬는 날 늦게 일어나 술 취한 눈 비비고 허위허위 그 낯선 동네로 달려간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해 낯설지만, 본 적이 있는 그곳!


    마을 초입에 들어서니 성인봉이던가? 천년학에서 본 그 학을 닮은 산봉우리 문득 왼편이 나타난다. 영화같지야 않지만, 아아 정녕 학을 닮은 산이 있다니


    그 밑에 빨간 양철지붕 얹은 주막도 보인다


    진목마을은 호박농사로서 농촌체험마을로 가꾸어져 있었다


    작가의 고향이라서, 작가의 생가가 있는 곳이라고 마치 박제된, 전원적이거나 목가적인 시골풍경이면 어쩌나 했더니, 쇠똥 냄새나는 진짜 시골이어서 다행이었다


    마을은 입구에서부터 드라마틱하게 전경이 펼쳐졌다


    마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작은 고개를 올라서야 하는데, 농촌체험마을이라는 호박장승 입간판이 서 있는 곳에 다다르면, 그곳에서 마을은 한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서 작가는 어느 문학청년 무리들을 데리고 왔을 때 저고리를 벗어 어깨에 걸치고 나름대로 폼을 잰 자세로 흑백의 사진 한 장 남겨 놓았다


    마을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마을 전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을 만 했다


    그렇게 말발굽처럼 둥그렇게 뒷산의 줄기가 마을을 포근히 감싸 안고, 마을 앞으로는 - 그 옛날, 작가의 어머니가 아들을 광주서중학교에 입학시키고 작가의 친척 누나네 하숙을 보내면서 인사로 싸보내기 위해서 잡았던 게들이 펄떡거렸을 갯펄 - 이 있었을 바다가 메워진 너른 간척지가 펼쳐져 있다


    보성만의 보성바다, 저 너머는 고흥반도의 높은 산




    나는 이곳에 20년 전 아버지가 타고 가신 꽃상여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안고 왔다


    그런데 아까 그 마을입구 고개마루에 올라섰을 때 보이는 화면의 중앙 마을회관 앞에서 막 시작된 노제의 풍경 속에 꽃상여의 자리는 없었다


    분향소가 설치된 서울 삼성병원에서 겨우 관광버스 두 대와 리무진 운구차 한 대가 왔을 뿐이었다


    얼마 전 박경리 선생이 돌아가시고, 원주의 선생 댁에서 통영의 노제까지 장례의 전과정을 촬영, 선생의 삶과 소설과 죽음을 다큐멘터리로 제작, 방송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 여기 온 것은


    그곳에서 선생이 타고가신 꽃상여와 상여소리와 시민과 독자와 팬들의 배웅을 보았기 때문이다




    기대가 컸기 때문일까? 초라한 노제, 대통령과 국무총리와 대법원장과 장흥군수와 장흥군의회부의장과 장흥군 회진면 기관단체장 일동과 진목마을 주민일동이 보낸 조화가 도열한 하얀 천막 속에 선생의 영정과 죽어서 받은 문화훈장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 작은 천막 앞에서 서울이나 광주 등지에서 온 100여명의 사람들과 또 그에 버금가는 장흥군민과 마을 주민들


    그렇게 조촐하게 노제는 치러졌다


    김석중 장흥군문인회 총무격의 사회자 진행으로 선생이 써오신 한평생의 주제이기도 했던 대통령표창 받은 명창의 소리 한 대목 “쑥대머리”가 구슬픈 상여소리를 대신하였다


    노제위원장 격의 장흥사람 소설가 한승원님의 조사, 그리고 장흥군수님의 말씀과 김영남 시인의 시 낭송, 대통령표창 받은 춤꾼의 춤사위로 노제는 끝이 났다


    선생의 소설 ‘축제’가 촬영된 그 마을회관 앞에서 축제인 선생의 노제는 김 모락모락 나는 육개장 한 그릇 없이, 화투판 한 개 없이 소리없는 축제로 그렇게 끝이 났다


    마을 사람들에게도 이미 상여를 매고 소리를 매기고 화투를 치며 밤새 호상하는 상례는 이미 기억에서 사라진 모양이었다




    박경리와 미백 이청준의 무게를 재면 누가 더 무거울까?


    선생은 평생 25편의 단편소설과 다섯권의 작품집을 내었다


    박경리 선생은 토지를 쓰고 김약국의 딸들을 썼으며, 내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작품을 썼고, 많은 이야기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또한 그녀가 아직 살아서 벌써 그녀의 기념관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그녀는 이청준 선생보다 더 오래 살았다


    글쟁이는 써낸 글로써만 평가받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그도 아직 살아 있을 때 그가 살던 생가가 장흥군의 기념명소가 되었지만, 기념관 같은 것은 없었다


    써낸 글의 양도, 읽힌 책의 양도 그녀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선생의 작품은 서편제와 축제와 천년학으로 임권택 감독의 영화가 되었고 영화들은 많이 팔렸지만 원작인 선생의 작품 자체는 큰 인기는 누리지 못했다


    선생의 노제와 그녀의 노제가 다르고, 꽃상여 하나 없이 초라하고 섭섭했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는 미백이라는 호를 썼는데, 그는 이미 백발이었다


    나이 일흔 두 살 아직 머리가 하얘지지도 않아도 좋을 아까운 나이다


    생가는 가운데 부엌을 둔 세 칸짜리 스레이트 집, 소박한 선생의 모습을 닮은 작고 마을 속에 겸손하게 엎드린 집이다


    관람을 위해 최소한의 손을 본 선생의 생가 마루에서 안내와는 달리 바다는 보이지는 않았다. 숲이 우거진 탓일까? 겨울에는 어쩌면 바다가 보일지도 모르겠다


    손을 보았지만 최소한으로만 손을 본 것이라서 부엌의 천장에는 선생이 직접 아궁이에 불 때 밥해먹으면서 생긴 검정 그을음이 그대로다. 윤기나는 무쇠 솥단지와 함께




    육개장 한 그릇 대접도 없는 선생의 노제는 서울에서 오느라고 낮밥 때도 지나서 시작해 오후 네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배가 고파 선생의 마을을 구석구석 살피지 못하고 밥집 찾아 나선다


    내 아이들에게 원색의 꽃상여와 저절로 눈물이 날 것 같은 상여소리를 보여주려 했건만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해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이벤트로라도 한 번쯤 보여주고 싶었던 선생의 노제는 나로서는 그렇게 서운케 끝났다


    장흥읍을 거쳐 올 때 탐진강변 읍내는 마침 제1회 정남진 물축제로 좁은 읍내에 차량과 사람들로 가득 찼다(정남진이란, 서울 광화문에서 보았을 때 정남쪽에 해당하는 곳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축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축제의 모습은 전국 어느 고을이나 비슷하다. 하루 서울의 유명 가수들을 불러다가 한바탕 노래공연을 하고, 한쪽에는 잔치판을 쫓아다니는 품바, 엿장수들, 여름이라 물놀이와 고기잡이 등 각종 시골체험들, 사실 시골체험이란 그런 목가적이고 전원적이며 낭만적인 고기잡이 등의 체험이 아니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닭똥같은 땀을 줄줄 흘리면서 고추밭에 바알간 고추를 따거나 농약을 치거나 밭을 매거나 가는 힘겨운 노동 속에서만 진정한 체험은 있다. 논이나 밭에 엎어져 밭을 맬 때 이이 맨 밭두렁보다 아직 매어야 할 두렁이 더 많아 보일 때 그 막막함 같은 것이 진짜 농촌의 느낌일 터이다


    그리고 나서 찬밥에 밥 말아 풋고추에 된장 푹 묻혀 먹는 새참 정도의 낭만이랄까


    비판하거나 비하하거나 시샘이 아니라 천편일률적인 축제의 모습이 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해 보는 소리다.




    차라리 선생의 죽음을 맞이하여 그의 영혼이 아직은 떠나지 않았을 죽은 육신을 실은 상여를 매고 읍내를 한바퀴 돌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한바탕 의미있는 축제인 노제가 되었을텐데


    그래도 선생이야 성실하게 살아온 덕분으로 이렇게 몇몇이 모여 노제라는 형식으로 동료 문사의 조사도, 춤사위도, 소리도 있는 가운데 작별을 고하지만, 성실했지만 업적이랄 것이 없는 보통사람들은 기본적인 장례의 절차조차도 갖추지 못한 채 장례식장의 냉동고에서 사르는 향의 향기조차 없이, 안녕이라는 인사도 없이, 살아온 동네나 집에 대한 작별인사도 없이 그렇게 허무하고 심심하게 매장되고 마는 서운함이라니




    옛날보다 부자되었는데, 더 이상 궁색하지도 않고, 초라하지도 않고, 세련되었음에도 허전함이 더욱 큰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정신의 계승은커녕 형식조차도 생략하고 없애버린 다음 오로지 남은 것은 편리함과 효율, 정신이나 정서, 마음은 사라져 버리고 편리한 일상 속에 말초적이고, 옅은 감각만 남은 것은 아닌가


    전통적인 관혼상제 중에 어느 것 하나라도 남은 예절이 우리에게 있는가?




    마을을 나와 천년학 촬영세트장인 주막에 가본다


    빨간 양철지붕, 정방형 창틀 얇은 유리창 속으로 보이는 주막 속,


    그리고 뒷간


    한데서 길가에 서 있는 주막은 주막으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했을 것이다


    역마살 낀 나그네들을 받아주고 품어주었을 주막


    마을마다 저런 시골 점방같은 주막들이 있었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찾아보기 힘든, 어느 고을에서는 완전히 사라져버린 풍경들


    어떤 것이 우리의 주변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려도 우리는 상관하지 않아도 될까? 그래도 괜찮은 것일까? 그 허전함은 단지 견뎌야만 하는 것일까? 그 추억되는 것에 대한 그리움은 그저 견디고 또 점점 잊어야만 하는 것일까?


    아버지들이 동네 점방에서, 점방 과자들 선반 밑이나 간이술청 밑 땅 속에 묻혀 있는 술독에서 퍼내진 막걸리 사발술에 김치 한가닥 잡숫고 술 묻은 입술을 훔쳐내던 그 정경은 아들인 내 기억 속에서 내 아이들의 기억으로 전수되지 못할 것이다


    아이들은 그런 장면을 본 적이 없으니 그것을 기억할리도, 추억할리도, 느낄 리도 없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가교역할을 하지 못했던 나의, 우리 세대의 잘못인가? 그렇다


    내 아버지는 1톤 트럭 화물칸에 타고 오시다가 화물차가 제방 아래로 굴러 느닷없이 돌아가시던 그날도 저런 점방에서 새우깡이나 고소미 같은 술안주용 과자에 쏘주나, 김치 한보시기에 스텐 대접에 퍼낸 막걸리를 자셨을 것이다. 음주운전을 한 그 운전자인 동네 아저씨와 함께 차를 뒤집어 버릴 만큼 취할 정도로 자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아저씨는 술을 자시고 걸어가기엔 너무 먼 그 길을, 역시 술에 취한 아버지들을 위해 그들을 자신의 화물차에 태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길은 눈을 감고도 십리 밖 집까지 찾아갈 수 있는 길, 술에 좀 취하기로서니 문제될 것은 아무 것도, 아무에게도 없었을 것이다


    1989년 5월 어느 날 저녁 아버지의 소식은 그렇게 하늘이 노랗게 느닷없이 왔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듣고 나와 어머니는 옆집 아저씨의 포니웨건 화물칸에 타고서 화물칸에 타고 오시다 전복되어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나러 갔었다


    차가 귀하던 시절


    노선버스가 닿지 않은 마을, 시내에 볼 일이 있으면 십리길을 걸어야만 했던 시절


    지나가는 차량이나 경운기나 말이 끄는 구루마가 지나는 길에 태워줌이 큰 보시고 행운이던 시절


    그 시절을 넘지 못하고 아버지는 가셨고,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길을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채로 나만의 자가용으로 매일 지나간다


    아버지가 넘어지신 그 지점은, 지금은 둑방길도 아니고, 둑방 아래 하천은 복개되고, 둑 아래의 경사는 사라져 버렸다


    그 지점을 지금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아버지의 영혼이 까맣게 그을린 얼굴, 황소처럼 억세고 모진 노동과 그럼에도 별 희망이 없는 절망같은 시절의 삶을 보람도 없이 감당해야만 했던 육신에서 분리되었을  그곳!


    그런 내 아버지의 얼굴도, 웃음도, 목소리도, 체온도, 내음도 이젠 점점 기억이 나지 않는다




    주막과 주막에서 보이는 학산은 천년학에서 본 그대로이다


    회진면, 이순신 장군이 귀향에서 풀려 백의종군하기 위해 도착한 그곳에는 열두척의 판옥선이 남아있었다지. 이순신이 회진포(항이라고 해야 하나 포구라고 해야 하나)에서 그 배들 수리하여 전열을 가다듬었다고 곽현준이가 그러는데, 그렇다면 그런 정도의 안내판 한 개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세계해전사에서 이순신 장군의 해전보다 더 위대한 전투는 없었다고 하지 않은가?




    회진면 사무소 소재지, 점심 때가 조금 지나 찾아간 몇몇 식당은 문을 열고도 장사를 안했다. 겨우 청송횟집에 들어가 된장물 물회를 시킬 수 있었다


    회를 먹지 못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서는 매운탕을 주문하였어야 하는데, 아내에게 미안하다


    회진면 사무소 소재지


    대한민국의 시골 마을은 모두 이렇게 사람의 그림자도 없이 시들어가고 있다




    장흥읍을 지날 때 광주지검 장흥지청을 보고 싶었다


    어쩔 수 없는 직업인, 법무부 소속 공무원으로 가는 곳마다 지청이 설치된 곳이면 그곳이 궁금하다. 장흥교도소 마저도 친근하다


    도로를 가로막고 있다시피 한 소나무, 입구 가운데 버티고 선 모과나무 정문에서 좌우로 테니스코트를 거느리고 한참을 올라가는 진입로, 그리고 2층의 아담한 청사와 넓은 뒤안과 앞뜰


    차량을 통과해보니 필시 이곳은 이미 일제시대 인력거가 다니던 시절부터 자리잡은 입지는 아닐지


    청사 앞 법조타운에는 법무사 사무실이 세 개 있다


    무변촌!




    좁은 로타리를 지나 읍내를 나와 보림사로 간다


    국보 두 개와 보물 네 개가 있는 대찰이지만 관람객은 우리 말고는 거의 없다


    전라남도가 외치는 남도 관광의 현주소이다


    대웅보전 부처님께 건영이 형석이 협시하여 절하고, 약수 먹고, 절을 나오다


    절집 앞 너른 주차장에는 우리 외에 차량 한 대가 더 있었는데, 가족인듯한 그들은 가스렌지와 불판에 지글지글 삼겹살을 구워 먹고 놀았다


    마침 절 안에서도 밥짓는 연기가 하얗게 피어올랐다


    고기굽는 냄새가 밥짓는 냄새를 덥어버렸다




    준비되지 아니한 장흥관광을 마치고 광주로 돌아오는 길


    하루해가 많이 짧아졌다


    장흥, 아마 처음 가본 고장


    관산읍을 지날 때 고등학교 한 반이던 박근태가 여기 출신임이 떠오른다. 친구는 101경비단 거쳐 지금은 서울에서 경찰로 아직 미혼이지 아마


    장흥반도를 반 갈라서 왼편 강진만 쪽으로 반도의 중간에 강진 칠량면 송정리 칠량면장 아들 배기롱이도 내 짝꿍이자 실장이었다.


    그 옛날 면장의 권세와 부귀는 다 어디 갔을까? 그리고 어디에서 왔을까?


    천년학에서 소리 호강하던 그 노인, 복사꽃 날리는 과수원 별장에서 오정해의 소리 속에서 눈감은 호사스런 노인도 면장이었지 아마도


    취화선에서 보던 조병갑 고부군수의 권세는 그야말로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한 것이 아니었는가?




    長興


    길이길이 흥하리라는 장흥


    천관산, 큰산


    다시 또 보리라